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장진호 전투 (문단 편집) === 11월 30일, 풍전등화 === 사실 이 정도는 낭림산맥 너머 서쪽의 미 8군에 비하면 매우 양호한 편이었다. 미 8군은 이미 부대 단위로 기동방어를 하며 후퇴하는 것이 아니라, 개별적으로 전면 패주 중이었다. 미 2사단은 [[평안남도]] 군우리와 숙천 사이에서 중공군에게 두들겨 맞아 30일 아침에만 병력 3천 명을 잃었다. 사단장 로렌스 카이저 소장도 도로가 마비되어 걸어서 10 km를 도망갈 정도로 풍비박산이었다. 물론 편제장비 대부분을 내다버린 채였다. 결국 미 8군의 전면적인 퇴각과 해병대의 포위라는 절망적인 소식 때문에, 이날 아침 [[해리 트루먼]] [[미국 대통령]]은 기자회견에서 "[[더글러스 맥아더]]가 [[원자폭탄]]을 쓸 수 있게 허락할 수도 있다."라고 말하였고, 이는 미국 전역에 공포감을 더욱 악화시켰다. 이 최악의 상황에서 '''맥아더와 10군단 사령부는 어떠한 계획이나 지시 사항도 해병사단에 하달하지 않았다.''' 30일 아침에 가서야 7사단장 데이비드 바 소장이 장진호 동안의 예하부대에 헬리콥터로 방문해서 처참한 상황에 대해 확실히 알았고, 10군단에 배속된 해병 상륙 작전 전문가 에드워드 포니 대령의 브리핑으로 10군단장 알몬드 장군도 비로소 [[장진호]] 방면의 상황을 파악하였다. 알몬드는 L-19 경비행기를 타고 하갈우리로 날아가, 해병 1사단장과 육군 7사단장에게 '하갈우리에 집결 후 사단 내 모든 편제화기와 장비를 파괴하고 수송기를 이용해 함흥으로 후퇴하라.'고 명령하였다. 그러나 스미스 장군은 이를 거부하였다. 사실 수송기로 후퇴하면 활주로를 지키는 최후의 병력들은 포기할 수밖에 없다. 이때 미국 전역의 신문들은 그들의 전멸을 예상하고 있었고, 정부 관리들도 ‘장진호의 해병대에게는 희망이 거의 없다’는 것을 인정했다. CIA 월터 베델 스미스 국장은 '오직 [[외교]]로만 맥아더의 우익(右翼)을 구출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한다. 스미스 장군은 숙소로 돌아와 작전참모 바우저에게 알몬드 장군의 지시에 대한 역겨움을 토로하며 "지금부터 우리는 모든 것을 우리 스스로의 힘으로 해나가야 하며, 10군단 사령부의 지시는 에누리해서 듣고, 10군단의 지원에 의지하지 않고 적의 포위망을 돌파해 나갈 것이다."라고 말하였다. 미 육군 지역인 [[장진호]] 동안에서 페이스 부대는 밤새 무리 없이 적을 막아냈다. 밤 사이에 성공적인 방어로 병사들 사이에는 "하룻밤만 더 지키자, 우리는 할 수 있다."라는 자신감에 찬 말이 돌았고, 공중투하로 탄약을 보급받았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40mm 포탄 보급은 안 됐다.] 오전에는 바 소장이 헬기로 안곡에 나타나 페이스 부대장과 면담을 하고 돌아갔다. 이때 페이스는 정식으로 맥클린 대령 대신 지휘권 승계를 인정받았으며, 페이스는 “부상자 5백 명이 있다”고 보고했다. 또한 이때 바 소장에게 후퇴 명령을 받은 것으로 추측된다. 바 소장은 하갈우리로 돌아가 알몬드 소장에게 "해병 항공 지원 아래 페이스 부대가 후퇴할 것이며, 다만 부상자 5백 명이 문제"라고 보고하였다. 해병대 스미스 소장은 “육군을 도와줄 여력이 없지만, 대신 해병항공대의 항공 지원 우선권을 페이스 부대에 할당해 주겠다”고 하였다. 페이스 부대의 후방에 있던 후동리 부대는 후퇴 명령을 받고 순조롭게 철수하였다(31연대 본부/본부중대/근무중대 44명, 31전차중대 176명, 57포병대대 근무포대 105명). 전술학적으로 볼 때 먼저 풍유리 병력이 후동으로 후퇴하고, 여기서 후동리의 병력과 합류하여 하갈우리로 후퇴했어야 하는데, 풍유리의 후방인 후동리의 병력이 먼저 후퇴해버린 것이다.[* 며칠 후 일이지만 페이스 부대는 후퇴하다가 후동리까지 와서 전멸하였다. 만약 후동리에 전차부대가 남아 있었다면 합류하여 하갈우리까지 후퇴에 성공하였을 것이다. 누가 개별적인 후퇴 명령을 내렸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이때 장진호 동안의 작전권은 미 해병대에게 있었지만, 통신이 원활하지 않은 상태였다.] 그날 밤 장진호 동안 풍유리 부대로 다른 날보다 빠른 20시부터 중공군의 공격이 시작되었다. 부대의 주화력인 대공포를 풀로 쏴도 부족할 판에 탄약 부족으로 4연장 50구경 기관총[* 국군에서 승공포라고 부르는 그것.]은 기관총 4정 중 2정만, 40 mm 보포스 연장기관포 2문 중 1문밖에 사격할 수 없었다. 중공군이 몇 번이나 미군의 방어선을 뚫고 들어 왔지만 그때마다 대공포가 전부 쓸어 버렸다. 이 날도 월광이 좋아 야간 항공 폭격이 큰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진정한 문제는 중공군 쪽에 있었다. 작전이라는 것이 없었고 서로 협조가 안 된 상태로 맹목적으로 산만하게 쳐들어왔다. 순간적으로 화력과 병력을 한 지점으로 집중시키는 전투를 할 줄 몰랐다. 또한 한 장소로만 쳐들어 왔는데, 구체적으로는 동쪽에 있는 32연대 1대대 A중대와 C 중대 사이와 북동쪽에 있는 31연대 3대대 L중대 방향으로만 쳐들어 왔기 때문에, 미군은 해당 지점에 병력과 화력을 집중 시키며 처리해나갔다. 침투하다가 사살된 중공군을 보면 기관총을 지고 왔지만 삼각대도 탄약도 없을 정도로 화력이 형편없었다. 하갈우리 역시 야간에 중공군 58사단과 59사단이 공격해 왔는데 해병대는 결사적으로 방어해나갔다. 밤사이에 사살된 적의 시체가 5백~7백 구였지만 해병대는 거의 피해가 없어서 1연대 I중대의 경우 전사자 2명, 부상 10명에 그칠 뿐이었다. 이스트힐 방어 전투에 참가한 영국 해병특공대는 적 시신을 장방형으로 쌓아서 2 m 정도 높이로 탑을 만들었는데, 텐트와 연결하여 바람을 막는 용도로 사용하기도 하였다. 영국 해병특공대는 얼마나 용맹한지 역습을 가해 중공군을 언덕 너머로 밀어버릴 정도였다. 시체탑이 점점 높아지는 것은 물론. 또한 이스트힐에는 후동리에서 후퇴한 육군 7사단의 31전차 중대 16대도 배치되었는데, 이들도 이날 중공군을 격퇴시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다음날 한 병사가 전차 2대 앞에 있던 중공군 사망자 2백 구를 발견할 정도였다. 이 전투뿐만이 아니라 대부분 전투에서 피아살상비는 압도적이었다. 주간에는 미군의 사기적인 항공·포병 지원으로 중공군은 산 속에 숨어 있었고, 야간에야 중공군이 미군 진지로 쳐들어갔지만 기본적인 소화기 화력이 하늘과 땅 차이니 미군 1명 죽을 때 중공군은 최소한 10배에서 많으면 100배 많은 병력이 죽어나갔다. 전투마다 해병대는 절망적으로 싸웠지만, 결과는 항상 해병대에 의한 일방적인 학살이었다. 그러나 진정한 적은 바로 '''추위'''였다. 미군이든 중공군이든 얼어 죽는 사람이 전사자를 능가할 지경이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